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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리즘 또는 스탈린주의(스탈린주의, 이슬:Сталинизм)는 1924년부터 1953년까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의 최고 지도자를 맡았다. 이오시프 스탈린 발상과 실천의 총체에서 지도자에 대한 개인 숭배 군사력이나 공작 활동에 의한 폭력적인 대외 정책 비밀경찰 지배를 배경으로 한 공포 정치이나 대규 모숙 청등을 특징으로 하는 전체주의를 가리킨다. 또 그것에 통 하다사상·체제이다. 스탈린 자신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라고 불렀다.
스탈린은 "레닌 가장 충실한 사도"를 자칭하고 그 지배 이데올로기를 "마르크스 레닌주의"이라고 명명하는 정식화 했다. 또 레닌 사후 레닌 묘와 레닌 상 등으로 신격화하기로 스스로의 개인 숭배도 추진했다.
"스탈리니즘"(혹은 스탈리 니스트)이라는 용어는 스탈린과 소련의 정부 및 코민테른 계보의 세계 각국의 공산당이 자칭한 적은 없다. 트로츠키 및 트로츠키즘 지지자(트로츠키 주의자)에 의해서 처음 규정된 호칭, 용어 및 개념이며 나중에는 로자 룩셈부르크 지지자도 사용했다."스탈리니즘"의 용어는 비 스탈린주의의 공산 주의자에게는 "관료주의", "전제적인 "자칭 사회주의 국가"의 숭배자", "독선적 인섹 셔널 리즘", "개인 숭배", "사회주의 혁명을 실질적으로 포기했다 기회주의", "세계 혁명을 포기한 일방 주의"등을 가리키는 멸시 어이다. 이들의 비판은 후에 트로츠키주의 운동, 특히 스탈린 사후의 스탈린 비판 후의 코민테른 계보의 공산당 운동의 밖에서 "뉴 레프트"(신좌익) 운동의 새로운 확대를 만들어 내고 일본에서는 반 스탈린주의 추세도 만들었다.
스타 리즘은 그 퍼진 의미에서는 스탈린 시대의 소련이라는 국가에서 전체주의의 형태를 가진 비밀경찰과 프로파간다가 특히 정치적 억압의 비참한 전술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스탈리니즘은 테러와 전체주의의 지배에 의한 통치를 특징으로 한다. "
정치사상
스타 리즘의 최대 특징은 스탈린 자신이 제안한 "세계 혁명을 거치지 않고도(러시아) 한국의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일국 사회 주의론)라는 테제이다. 레닌, 트로츠키를 비롯한 러시아 혁명기 볼셰비키 지도부는 일치된 견해인 대전제로서 "한 나라의 혁명과 국제 혁명-세계 혁명의 결합 없이 자본가의 착취를 폐기하는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과 확립은 불가능하다"(세계 혁명론)을 공통의 인식했다. 그것은 제일 인터내셔널 이후 마르크스주의 초보의 원칙이기도 하다.
러시아 혁명을 성취시키고"반혁명 간섭 전쟁"에 승리한 소비에트 정권이었지만 레닌, 트로츠키 등이 전망한 유럽 혁명은 독일을 비롯한 모든 나라에서 패배한다. 또 소비에트 국내에서도 간섭 전쟁과 "반혁명"세력과 내전으로 인해서 많은 인명을 잃고 국토가 황폐한 결과 민중의 혁명 열정은 떨어진다. 1924년 레닌의 사망에 따른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취임한 스탈린은 피폐한 러시아 민중과 공산당 내 의식을 배경으로 "세계 혁명 없이도 사회주의는 건설할 수"이라며 그 권력을 이용하고"레닌 기념 입당 운동"이라고 칭하고 출세 지향의 사람을 대량으로 당원이 채용하기로 당내 다수파를 형성하고 트로츠키 등 혁명 시의 볼셰비키 지도부를 추방하다. 당원의 대량 채용에 의한 다수파 형성은 볼셰비키-러시아 공산당에게도 "의식적인 공산 주의자의 당"이었던 본연의 자세로부터 극단적인 전환이다.
또 스탈린은 소련 공산당의 권위를 배경으로 코민테른에도 군림하면서 각국의 공산당 내 좌파적인 부분을 "트로츠키 주의자"로 추방하다. 이후 코민테른은 "세계 혁명 노선"을 실질 포기했다"소비에트 연방 방위를 위한 도구"로 "각국 혁명 운동의 이익"보다 "소련의 이익"이 세계 각국의 공산당에게 우선됐다.
1934년 소련 공산당 당 정치 국원 키로프 하지만 누군가에게 암살된다. 스탈린은 이 사건을 "트로츠키 일파의 소행"으로 몰아붙인다(조작임이 확정되지)"사회주의 건설이 진행될수록 제국주의에 지원됐다"내부의 적"의 반항도 격렬하게 된다"(이른바"계급투쟁 격화론")라는 테제를 가지고, 1936년 본격적으로 "대숙청"을 시작한다. 스탈린은 스스로 반대하는 사람, 혹은 말살하고 버리고 싶은 자에 대해서"트로츠키 주의자"라는 꼬리표를 사용했다. 여기서 말하는 "트로츠키 주의자"와 "소련의 파괴를 꾀하다 트로츠키를 두목으로 한 반 혁명 분자에서 제국주의의 앞잡이의 무리"혹은"파시스트의 제오열"등으로 정의됐지만 실제는 숙청된 많은 사람들은 트로츠키, 트로츠키의 지도하는 "좌익 반대파"조직(후에 넷째 인터내셔 넓을 형성하는)과는 무관이었다. 이 상표로서의 "트로츠키 주의자"라는 용어는 "간첩 도발자"또는"좌익을 가장한 반혁명"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세계 각국의 공산당에 의해서 제이차 대전 후에도 오랫동안 사용된다. 대숙청은 공산당 내에서 소비에트 적군, 소련 에망 명했던 각국의 공산당·국제 공산주의 운동가, 그리고 소비에트 사회 전반으로 및 그 희생자는 최대 700만 명에 이른다고 추정된다.
"마르크스주의"에 "민족(배외) 주의"또는"내셔널리즘"개념을 간 것도 스탈린의 "공적"이다. 트로츠키를 비롯한 혁명기의 볼셰비키 지도부 상당수가 유대인이었지만, 스탈린은 반유대적 선전으로 그들 정적의 추방을 구실이 생겼다. 또"일국 사회주의 건설론"자체도 민족주의적으로 고무한 측면도 있다. 스탈린이 그"민족주의"를 가장 고무한 것은 나치 독일에 따른 소련 침공의 시기이다. 스탈린은 그 반격전을 "대조국 전쟁"(이슬 이름 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영역 Great Patriotic War)으로 명명, "러시아 민족의 명운을 건 결전"은 과거 러시아 역사에서 영웅 신화를 선전하는 국민·병사의 사기 진작에 이용했다. 또 소련군의 고전에서 그것까지 성직자·수도사·수녀 일반 신도 다수의 살해나, 대부분의 성당 물리적 파괴 등을 동반하는 탄압을 정교회에 가한 자세를 반전시키고 러시아 정교를 이용함으로써 "러시아·정체성"을 극한까지 선동했다.
이 시기의 각국 공산당의 반 축·레지스탕스 전쟁은 프랑스 공산당과 그리스 공산당, 중국 공산당 등으로 대표되듯이, 민족주의 애국주의의 색채를 짙게 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1943년에는 "반파쇼 전쟁"에서 코민테른 를 해산시키기 코민테른 계보의 공산당"스탈리니즘"의 특징으로 "프롤레타리아 국제 주의"보다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강령·방침이 꼽힌다(일본 공산당에서는 "민주 민족 통일 전선"이라는 강령 혹은"진정한 애국자의 당"이라는 선전에 표현되고 있다).
체제의 일반적 성격
1930년대에 스탈리니즘에 바탕을 두고 성립한 일국 형사 회주의(특히 그 국가 체제)를 가리키고 소련형 사회주의이라고도 불리는 이들 국가가 실현한 것을 사회주의라고 부를지에 대해서 오랫동안 비인 스탈린주의의 파·활동가 사이에서는 논란이 벌인. 소련 및 스탈린 소련 공산당, 코민테른 계보의 공산당을 지지하지 않는 사회주의자들 은사 회주의 단어에서 구별하기 위해서"관료적으로 변질된 채 타락한 노동자 국가"(트로츠키), "관료적 집산 국가"(막스 샤하 토만-트로츠키 파에서 분열된 미국의 활동가), "국가 자본주의"(토니 클리프-트로츠키 파에서 분열된 영국의 활동가), "적색 제국주의"(구로다 간이치)"스탈리 니스트 관료 국가"(핵심파등)등으로 규정됐다.
또한"로자 주의자"및 아나키스트는 레닌 시대의 볼셰비키, 트로츠키주의 도인 스탈린주의의 경로로 비판하고 동질의 강권적인 "국가 공산주의"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1991년에 소련 붕괴 이후 세계 각국의 공산당은 당명 변경 및 사회 민주주의 변신을 대세로 영향력의 저하는 부정할 수 없다. 그것과 동시에 잔존 공산당의 "스탈리니즘"의 체질 약화도 지적된다.
카를 비트 포겔은 아시아 국가의 제도 연구에서 "동양적 전제주의"개념을 만들고 이를 적용하고 스탈리니즘을 설명하려 했다. 실제로 서방에서는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민족적으로도 소련은 유럽과는 이질의 존재(동방 정교회 문명) 하고 유라시아와 북아시아로 분류했다. 또 쑨원 대아시아 주의는 소련을 아시아 국가로 보았다.
경제 정책
스탈린은 소비에트 정권 이전 시 공산주의에 따른 간섭 전쟁과 내전 승리와 함께 시작했다"신경제 정책"(이른바 NEP)에서 전환, 1928년에 고엘로·플랜을 거대화 시켰다 제일차 오 개년 계획을 시작한다. 그것은 서방 진영으로 빠른 속도로 따라잡으려는 산업화 정책이며 군사력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또 산업화를 후방에서 지원하기 위한 농업 집단화(콜 호즈)를 세트로 했다. 거기에서는 근로자의 극단적인 노르마를 부과했다 성과 주의(스타 하노프 운동)와 "부농(클라크)의 멸종"이 들렸다. 발전소와 댐 건설 등의 거대 프로젝트에 의해서 노동자는 동원되어 강제 수용소에서 "( 생겨난) 죄수"가 무보수로 일하고 농작물은 강제로 징발되어 광범위한 기아 지대(특히 우크라이나)와 대량의 희생자를 쓰게 된다. 이들 정책에 따른 소련의 국력은 제이차 세계 대전전에는 유럽을 넘 어미 국 다음초 강대국 지위를 얻었다.
현재는 중공업 중시를 통한 "생산력 지상주의"에 근거한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전망도 "스탈리니즘"의 계보를 끌고 있다 사고 및 지향과 말도 있다.
당 조직론
다음과 같은 스탈린 및 소련 공산당, 코민테른 계보의 각국 공산당의 실천 형태·실천 결과를 총칭해서 비인 스탈린주의 좌익은 "스탈리니즘"라고 정의한다.
볼셰비키는 원래 욕도 의사록에 남기고 정책·방침에 따라서는 분파 활동의 형성을 용인하는 당내 민주주의의 정도의 강한 조직이었다. 러시아 내전기에 지도부의 강화를 목적으로 하고 종파 형성은 금지되었지만, 적어도 레닌, 트로츠키들에게는 "내전기라는 비상사태의 일시적 조치"로서 자리매김되고 있었다. 이를 스탈린은 레닌 사후, "당은 실천 집단이지 토론 클럽이 아니다"라는 명제로 "바위의 민주 집중제 절대 원칙"으로 분파 형성을 금지한다. 이"원칙"이 "지도부 비판=적대자"로 규정되는 토양을 만들어 내게 된다. 각국의 공산당도 예외 없이 이"원칙"을 본뜨고 가게 되는데, 이"절대 원칙"에 의해서 당내 토의, 당내 민주주의(비판의 자유)보다 지도부의 "지령""지도"가 절대화된다 관료주의하지만 각국의 공산당을 공통적으로 좀먹은 큰 근거가 된다.
"진리는 하나이며 그 진리에 서는 노동자 계급 전위당은 각국에 하나밖에 없다"또는"통일된 당은 노동자 계급과 혁명의 사령부로 사령부가 몇 개 더 있었다면 명령 지휘 계통이 혼란스럽다"라고 일국 한 전위 당론은 자파 이외의 공산주의 정당 및 공산주의자를 배격하고 민중 운동은 자파에 의해서 지도되어야 한다는 독선 주의 논리로 작용한다. 그것은 "공산당 주도 아니면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혹은"대중 운동과 노동조합 등 대중 조직은 공산당을 확대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공산당의 지도 밖의 운동은 파괴해도 좋다"라는 식의 사고를 초래하고"대중 운동의 이익"보다 "공산당의 이익"을 우선하는 체질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스탈린의 지도 아래 코민테른 계보에 속한다 공산당은 스탈리니즘 정당인지 모든 것이 그랬던 시절을 겪었다. 특히 프랑스 공산당은 스탈리니즘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고 있어"모스크바의 총아""모스크바의 장녀"(모스크바의 의향에는 거의 따르라는 뜻)로 불렸다. 제이차 세계 대전 뒤 세계 3분의 1의 영역을 지배했다 사회주의 국가군의 대다수는 스탈린과 대립했다 티토 주의와 유고 슬라비아를 제외하고 소련형 사회주의 국가인, "스탈리니즘"에 지배된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소련과 거리를 둔중화 인민 공화국의 마오쩌둥 사상과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의 혼자 주의 등은 모두 스탈린 사후의 스탈린 비판에 부정적이지 스탈리니즘에서 파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