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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대하여

사대주의란 무엇일까

Info___classy 2020. 7. 15. 20:51

사대주의(시대 주의)는 작은 세력이 강한 세력에 복종하다는 생각을 의미하는 행동 양식으로써 동 아시아 외교 정책의 방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사대의 어원은 『맹자』의 "이소 사대"(=소를 두고 크게 시중들다)의 한 구절이다. 맹자에는 코시가오를 섬긴 예가 지혜로 쓰이고 있다. 즉" 작은 나라의 억센 외교 정책(지혜)"라는 것이 본래의 뜻이다. 그러나 후년에 가면 명분론 와 결부되어"소국인 자신들은 그분을 알고 자국보다 대국의 이익 때문에 다해야 한다", "지배적 세력이나 풍조에 영합하는 자기 몸을 사리는 생각" 같은 부정적 뉘앙스도 띠게 됐다.

맹자의 어원에 있듯이 원래는 중국 전국 시대의 국가 군웅할거의 외교 책략이었지만 한나라 이후 중국에서는책봉 체제 즉 주변 국가들에 대한 사대 조공 체제가 구축되게 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중국(나카하라)에 대한 사대주의와 소중 화사 상는 복잡한 긴장·영향 관계를 유지했다.

조선 왕조

책봉체제에 의 한 외교를 "사대 외교"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다, 이 의미로는 신라·고려·이조 등 신라 이후의 한반도 태어난 왕조의 대부분은 중국 대륙의 나카하라를 눌렀다. 통일 국가를 상대로 사대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 왕조에 조공하면서도 신라, 고려는 중국 왕조와의 대결과 독자의 황제 학위 사용 등도 하고 강온 섞은 대중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 그 정책은 『 사대교린(사대교린)』다고 해서 사대주의가 외교 방침으로 강한 것이었다고 한다. 조선을 열었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1388년) 때" 작은 것을 가지고 큰 대자에 일(김) 보통은 보국의 길"이라고 주창하고 명나라와의 개전을 결정할 당시의 고려 정권을 쓰러뜨리는, 명왕 왕조를 열었다 주원장도 이에 화답하고 조선 건국 직후의 1392년에 "목소리교 스스로 따르다"것을 조건으로 독립을 보장하는 일을 줄였다.

16세 기니 주자학 계통화되자 사대의 자세는 더욱 강화되어 가게 된다. 즉, 책봉 체제를 명확히 군신 관계로 삼아 명분론을 바탕으로 "사대는 군신의 본분 시세에 관계없이 성의를 다하다만 "과 본래 보국의 수단에 불과했던 사대 정책 그 자체가 목적화된다. 조선 쓰바메 행사였다. 조 허는 때의 명나라 황제 만력제 더 알현을 받아 영예를 받아 대명 제국의 일원(책봉 국)으로서 세계 질서에 참가하고 있는 것에 감격했고세 궤고 고두 치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또 이러한 영향은 조선의 내정 면에도 나타나고 아키히토이면 비록 해적이라 할지라도 처형할 수는 없고 명나라에 정중하게 수송해야 했다. 그래서 후기 왜구라고 직접 대치한 지방의 무장들은 전투의 자 중에 일본인과 아키히토의 판별한다는 난제에 노출되어 아키히토를 살해했다고 해서 처벌되는 사람도 존재했다.

이러한 자세는 조선 말기에도 여전히 계속되어 키요시 황제 오천자로 사대한다는 명분으로 근대화 반대 세력이 존재하고 그들 은사 대당 등으로 불렸다. 대해서 근대화론자에게는 구미 중심의 세계 인식과 전통적 소중 화 사상을 결합시키고 청나라를 모멸한 것도 많았다.

조선의 사대주의는 전통적인 화이 질서에서 합리화되었다. 조선에서의 화이 질서는 스스로를 중화 함께 문명국이라면서도 정치적으로는 명나라에 사대하는 신하로 삼고 있었다. 17세기, 여진족의 청조는 한족의 명조 대신 중원 지배를 확립시키면 조선의 유학자들은 그동안 이적, 금수와 멸시한 여진족에 중화를 계승할 자격을 인정하지 않고, 조선이야말로 유일한 중화 문명의 계승자라고 자부하는 한편 현실에는 청나라에 항거하기 어렵고 병자호란 니요리 인조는 세 궤고 고두의 예를 갖추고 청나라에 대한 신종을 서와 산다.

조선의 사대주의의 실제의 요인으로는 고구려·발해 멸망 후에는 조선 반도의 국가에는 중원에 패권을 장악하다 중화 제국과 만주·몽골의 유목 제국에 대한 군사적으로 방어전 안 되며, 고려에게 항복 이후에는 조선 독자의 황제호의 사용이 엄격한 중화 제국에서 감시되게 되었으므로, 사대주의를 안전 보장상도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 등이 거론되고 있다. 이조 말기에는 정변이 일어날 때마다 청, 러시아 제국, 일제, 아메리카 합중국 등 각종 국가에 사대처를 바꾸고 국내 통일이 되지 않고 마침내는 대 일본 제국의 병합을 잃게 됐다.

한국에서의 평가

 

한국에서는 고종과 민비 무지무지처를 차례로 바꾼 행동을 조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평가하고 있지만, 조선 말기는 이미 독립국으로 할 만한 것은 아니며 최기호와 오손하들처럼 그것을 즉흥적인 대응에 불과하다고 평가 연구자도 있다.

한국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신의 책 『 국가·민족·나 』에서 "우리 반 만년의 역사는 한마디로 퇴영과 조잡하다고 침체의 연쇄사였다""고식적, 나태, 안일, 기회주의에 나타나는 소아병적인 봉건 사회의 한 축도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조선사에서의 사대주의를 자각하고 자기 저서 『 한 민족의 나아갈 길 』에서 한국인의 "자율 정신의 결여""민족 사랑의 결여""개척 정신의 결여""퇴폐한 국민 도덕"을 비판하며"민족의 나쁜 유산"의 하나로 사대주의적 비판하고 있다.

일본

 

일본에는 "사대"이라는 정치적 용어도 명확한 개념도 없었지만, 중국 대륙의 여러 왕조의 책봉 체제에 편입 이를 정책적으로 이용하려고 한 시기도 존재한다.

"후한서"에 의하면 건무 중원 2년(57년 하카타 만 연안에 소재한 것으로 보이는 왜노 국의 수장 이후 한의 광무제에서 왜 놈 국왕에 책봉되고 금 표와(위노 국왕 인) 사여을 받았고 또 왜국 왕의 수 승가 영초 원년(107년)에 생구를 바치고 왔다며 기술이 있다. 이 조공은 5세기 말까지 단속적으로 이뤄졌다. 이 시기의 왜국 왕(왜의 고오)은 중국 사서에 이름이 보이는 사람이 찬하고 진부, 제스 흥, 다케시는 5명 있어 이들 고오는 4세기 후기부터 한반도 남부의 가야 제국 군에 자원·이권 획득 때문에 개입하려 하자 그 땅의 책봉을 받은 명분을 얻어내려 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규슈의 상인·비분 자에서 대명 나라 무역이 막대한 이익을 낳기를 전문한. 그러나 명은 화이사상의 이념으로부터 조공을 표면과 무역만 보인다. 요시미쓰는 1401년 5월 13일 비부과 불승·조아을 명나라에 파견하고 국교를 제의했다. 명나라 사신은 다음 1402년 8월 3일에 일본 방문하는, 요시미쓰의 신청을 승낙하다. 사실의 국서를 전달하고 여기에 이른바 감합 무역이 개시되었다. 명나라 사신이 가진 국서에는 "너 일본 국왕원 도의"즉, 요시미쓰를 명나라의 책봉 국의 왕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의 표기가 있었다. 대한 요시미쓰는 명나라에 국서에 명제의 신하라는 뜻의 "신하원"이라고 밝혔다. 요시미쓰의 국내의 권력 확립에는 윤택한 자금이 필요한. 그러므로 막대한 이익을 올리 대명 무역을 계속하면서 책봉 체제 아래로 내려가는 일은 필수적이며, 요시미쓰는 이름을 버리는 이득을 취한 것이다. 당시 이는 막부 내부에도 비판이 있었지만, 요시미츠의 권세 앞에서는 공적인 발언을 못하고 각각의 일기 등에 기록뿐이었다. 요시미쓰의 사후, 이런 비판은 표에 나타나는 감합 무역은 일단 폐지되기도 6대 장군·아시카가 요시노리 이후에 재개한다.

한편 일본은 중국 중심으로 사대적 세계관에 대한 거부 반응도 강하고 왜왕(일반적으로 필자는 쇼토쿠 태자 것으로 알려진 수의 양제에게 보낸 국서의 서두"일출 대처 천자 치서 일 몰처 천자 무양 운운"은 대등 외교를 분명히 한 것으로 유명한데, 양제는 중국적 세계관과 맞지 않다 이 문면에 화가 났다고 전해진다.

또 제1차 조선 출병(임진왜란)의 강화 협상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분로쿠 5년(1596년) 9월 내조한 명나라 사신과 회견했다. 히데요시는 명나라의 항복의 보고를 미리 받지만 그것은 허위 보고이며 실제 명나라 사신의 국서 내용은 히데요시를 "일본 왕으로 인정하고 조공을 내주었다"라고 한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이를 일본을 속 국시 하며 오히려 분노하고 사자를 물리치고 조선에 다시 출병을 결정했다.

에도 시대의 복수의 소화 책에 유학자가 요츠야부터 신주쿠(당시는 시골이었다)에 이사, 왜 일부러 불편한 땅으로 이사하는가라고 묻는다"당나라 세리 가깝기 때문이다"라고 또박또박 대답했다는 짧은 재담이 기재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소화로서의 창작이지만 당시 유생이 당나라 오공 자본국으로 우상시하는 경향이 동시에 요츠야에서도 신주쿠에서도 당나라에 아득히 먼 것에는 변함이 없는데 불편한 신주쿠로 이사를 가겠다는 그 모습을 농담 거리로 되어 있던 당시의 사회적 풍조를 잘 전하고 있다.

류큐 왕국·오키나와 현

류큐 왕국에서는 명청 두 아침부터 책봉을 받은 것부터 일본 본토보다는 사대주의의 영향이 강했다. 조선보다 더욱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자기 병력만으로 외국의 침략을 막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수례 문현 판"수례 지방"은 "중국 황제에 대해서 신종의 예를 두고 있는 나라(쿠니)"을 의미하며 류큐 사대주의를 구현한 말이었다. 즉 수례 문은 조선의 영은문 상당하는 문이었다. 류큐 국왕과 그 신하는 슈리 성에 서세 궤고 고두의 예를 책봉사에 대해서 갔다.

류큐 왕국은 메이지 정부에 의해서 오키나와 현이 설치되어 일제에 병합되었지만, 또 그 후의 오키나와전에 의해서, "일본 제국보다 더욱 강한 아메리카 합중국"을 몸소 증명된 것이고, 오키나와의 사대주의는 하나의 전기를 맞았다.

전후, 수용소 수감된 주민들이 귀환했을 때 나하 시에 있었다. 야마시타 쵸우는 야마시타 도모유키 육군 대장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페리 구로 개칭하는 등 점령 당국에 영합한 개명이 열렸다.

그리고 1960년 보다 미국민 정부에 의해서"고등 판무관 자금"이 마련됐다. 이는 고등 판무관 자유 재량으로 관내 시읍면 자금을 투입한다는 것이었다. 시읍면의 수장은 고등 판무관에게 빌붙고자"미류 평가 위원회"를 조직하면서 미국민 정부가 권장하는 "미류 친선"을 연출했다. 고등 판무관의 지방 시찰은 마치 군주의 행차의 감을 띠면서 안에는 "고등 판무관 각하"에 만세 삼창 하는 사람도 나왔다.

또오기 미 조덕처럼 이전의 일제의 천황의 위세를 선전하고 남진론를 격려하고 전후는 일 전하고 미국민 정부의 위세를 빌려서 미국의 협력 하에 "류큐 독립"을 호소하는 등 항상"종주국"의 뜻에 따른 주장을 펴는 정치가도 있었다.


한편 앞의 박정희 대통령의 비판처럼 류큐 왕국 및 오키나와 현·류큐 독립운동에서 사대주의에 대해서도 강력히 비판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오키나와 학대가 이하 흥도 자기 저서 『 옛 류큐 』에서 오키나와인의 흠으로 "사대주의""망은 기질"을 들어 타부현인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언어 풍습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이 같은 현민 성이기 때문이라며"그들(오키나와인)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친구를 팔고 스승도 팔고 경우에 따라서는 나라도 팔"[요 페이지 번호"오키나와인은 시민으로서도 인류로서도 지극히 초라하다"라고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도 오키나와 일본 귀속 의식을 없앨 수 없으며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는 오래가지 않고 1950년대에는 본토 복귀 운동이 시작된 후 1970년 미군 병사의 불상사(교통사고)가 연달아 일어난 것으로 정점에 달했다. 코자 폭동이 발생하면 미국에 류큐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도록 하고 1972년 니오 키나와 반환 일본에 복귀했다.

"류큐"호칭의 거부 정서

 

"류큐"이란 표현은 자칭의 "우치나 "이나 메이지 이후의 "오키나와"와 달리 명·청 두 왕조와 미국에서 주어진( 불림) 국명(지역명)이며, 외래 세력에 대한 사대주의를 상징하는 호칭했다는 주장이 있고 특히 복귀 직후는 그에 대한 거부 정서가 강한 왕국 시대에서 길러져"류큐 문화"로 불린 것에 대해서도 "오키나와 문화"와 바꾸는 사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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